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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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미역

2022.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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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한번은 해봤던 경험.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무언가를 잘 못했을 때 

어른들은 늘 반복적인 일을 잘못의 대가로 주곤 했지.

 

처음엔 '아, 내가 잘못을 해서 이걸 하고 있는거지'

하는데 그 반복적인 것을 하다보면

내가 잘못한 것들을 잊게 돼.

 

반복적인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과

펜을 잡은 손가락의 아픔 또는 육체적인 고통이

내가 잘못한 것들을 잊게 되고

 

그 반복적인 것들을 끝내고 나면 

잘못은 잘못이 아니게 되고

아픔은 아픔이 아니게 되더라.

속이 후련했고,

그게 뭐라고 성취감도 드는데..

 

제일 힘든건 그거다.

내 잘못과 아픔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은 살면서 두고두고 생각나더라.

2022.0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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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집에 이사를 온 후에

항상 궁금했던 창문 밖 건물.



같은 모양의 건물이 두개나 큼직막히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인터넷 지도를 보면

그냥 녹지로 되어 있고..

매번 밤새 불이 켜져 있어.


7층 8층쯤 되려나

그냥 그러려니 뭔가 정부의 연구기관이나 

중요한 건물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검색해 봤는데


글쎄 구치소래.

교도소나 구치소나 그곳을 가보지 않은 일반인은 큰 차이점을 

모르듯 나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갇혀 있고 밖을 마음대로 나올 수 없는 곳.



내가 많이 무언가가 답답하고갇혔다고 생각할 때

창문 넘어 똑같은두 개의 건물 구치소를 보고 있으면



난 이미 자유롭게 밖에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해방되었다고 생각해.



죄를 떠나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갇혀 있는 건 끔찍해.

2022.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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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 한다. 뭐 딱히 광장고포증이 이런게 있는게 아니라

아!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많은 곳은 괜찮은데,

사람이 많은 곳을 헤집고 들어가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싫다.


뭔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불편하고 신경이 많이 쓰인다.

2022.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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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렇게 지하실에 들어가

밴드 음악을 알게 되었고..


사실 꾸준히 연습해 오면서도

나는 참 소질이 없구나 싶었다.


늘 지하실 맴버들의 버스킹을

따라 다니다가


처음으로 곡 하나를 하라고

제안 받았다.


선배들과 같이 하는게 아니라서

부담은 덜했다.


그때 있었던 그 도시의 번화가에서

무대가 차려져 있고


첫 드럼 연주를 하는데


이런!


역시 선배들이 여분의 드럼스틱을

챙기라는 이유가 있었다.


연주하는 도중 드럼 스틱하나가

버스킹을 보고 있는 

관중석으로 총알 처럼 날아갔다.


그 찰나에 그게 날아가는게 보이더라

다행히 다친분은 없었는데...


무사히 버스킹 연주를 마쳤고..

그게 나의 첫 드럼 연주 였다.

2022.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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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늦으면 영원히 해방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세상에 없는 부모님에 관한 것. 

나의 아버지는 정말 엄청 극중에 염제호 같은 성격 이었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한마디도 해서는 안되는 툭하면 욱하는 스타일 이었다. 

어머니께서도 많이 어려워 하셨는데 아마 그 성격 때문이었을거다. 

아버지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아버지와는 오래전 부터 떨어져 살았다. 

나와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야 아버지를 뵈어야 겠다는 생각에 

수소문 끝에 찾아 뵈었는데 그래도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고 

상이 부러져라 맛있는 점심을 내오셨다. 

어릴적 내가 보아왔던 욱하는 성격 없이 

별 말없이 따뜻하게 조용히 반겨 주셨다. 


'아버지, 어머니 있는 곳에 가서 같이 살면 어때?' 

라는 말에 아버지는 염치 없다는듯 손사레를 치셨다. 

내가 아마 그때 끌고 내려 가길 작정했었더라면 

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버지의 멱살을 끌고 서라도 어머니와 있던 

그 곳으로 데려 갔었다면... 

홀로 지내다 사고가 나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건데... 

경조사가 있을때 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그립다. 


살아가면서 방향을 잃었을때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싶은데 듣지를 못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을 잃어버린채 표류하는 거 같다.

2022.08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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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카드놀이나 

남을 때리거나 

술을 먹거나 

당구를 칠 줄 알거나 

논다는 친구들이 하는 그런 일들을 

할 줄 몰랐다.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데 

그때 그날은 내가 일탈을 하고 싶었다. 

하염없이 시내를 걷고 걸었다. 

발걸음이 무겁고 지칠때 즈음, 

어느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쪽에서 

여러 악기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멈추고 또 다시 들렸다. 

한참을 계단에 쭈그려 앉아서 듣고 있다가 

한계단 한계단 내려가서 머뭇거리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배냄새와 퀘퀘한 

지하의 냄새가 코를 자극 하였고, 

악기를 들고있는 이름모를 사람들 

상전처럼 여러 북속에 파뭍혀 있는 사람이 

'쟤는 누구야?' 라는 표정으로 가우뚱 거리며 

나를 보았다. 

 

그 정적 속에 뭐라 할말이 없어서.. 

"그냥 음악 소리가 들려서 들어 왔어요." 라고 말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어떤 멜로디를 서로 연주를 하는데 

라이브 콘서트에서나 볼 듯한 굉장하고 우렁찬 사운드였었다. 

 

한참을 쇼파에 앉아서 듣고 있는데 

연주가 멈췄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냥 저도 악기가 배우고 싶다고 했었다. 

 

제일 뒤에서 연주하는 악기가 뭐냐니까 

드럼 이라더라 

 

그래서 고2의 나는 

불현듯 들어간 지하실 밴드실에서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내향적인 성격이 많이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었던 거 같다. 

 

인생에서 지우질 못한 친구들도 여기서 만났는데 

다들 지금은 뭘 하면서 살까?

2022.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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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때 부터 인가
기억하는 것만 하여도 15번정도

엄청나게 이사를 다녔던것 같다.

가까운 동네에서의 이사라면 모를까
강원도에서 목포, 포항, 창원 등등

내향적인 성격에 전학간 곳의
친구들과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겨우 어렵게 친구를 사귀게 되면
전학을 갔다.

그때 아버지의 직업은 전기공사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뭔가 많이 힘드셨을까

어느때는 전학을 간 학교에 하루 등교를 가고
다음날 이사를 간적도 있으니...

자연스레 잦은 이사로
친구들에 대한 마음을 많이 닫았다.

처음 몇번의 전학은 아픔으로 다가 왔는데
매번 반복하다보니
친구를 만들지 않게 되었고..

그저 그렇게 아무런 기척없이 떠나갔다.

어렸을때 부터 혼자에 길들여진 나는
여전히 지금도 두환이와 정훈이 같은
친구가 없다.

아무도..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로인해 홀로계신 어머니와
더 많은 곳을 이사를 다녔다.

그때 부터 였을까..

어머니는 내가 집안의 모든 전자제품들을
어렸을때 부터 뜯었다 조립했다 했다고 한다.

나는 그게 좋았으니까
그냥 내가 버리지 않으면 떠나지 않는
유형의 제품이 좋았고 애착이 되어 버렸다.

사람은 언제든 만났다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떠나니까...

그래서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된걸까..

사실 내 직업도 사람과 많이 소통을 해야 한다.
그냥 그저 소통 잘하는척 연기를 할 뿐이다. 

2022.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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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의 무덤덤함을 깨는
카톡1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내용을 봤기 때문일수도 있고
경기도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직도 그와의 만남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게 연락이 온다는 건
아직도 추앙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거다.

연락에 대한 약속을 했기에...

아픈 손가락 같은
그는 곁에 있는 내내
같이 있어도 늘 고민거리가 맴돌고
늘 혼자 인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지금도
내 세계관에 맴도는 그.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냉정과 열정사이.

그의 삶을 알기에
또 다시 시작한다는건
서로에게

큰 용기가 필요하다. 

2022.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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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미정과 꼭 같은 직원이 '우리도 해방일지 작성 해보는 건 어때요?'
라는 말에 나는 해방클럽이라는 단톡을 만들고
해방일지라는 노트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열정도 없고,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일들을
모두 손에 놓았던 그때에

돌이켜 보면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았냐는 무심코 건넨
그말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까..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를 되내어 보며
나에 대해 일지를 쓰게 되었다.

박해영 작가 님에게도 감사드린다.
그 드라마 덕에 내가 웹에서 해방클럽을 만들고
해방일지를 쓰고 나누게 되었다.

22년 7월 22일 회사내 해방클럽의
첫번째 모임이 있었고

나와 두환이와 정훈이의 저녁처럼
편하게 지내고픈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편안했을지...

늘 사람과 일을 하는 나의 해방클럽
사람들에게
응원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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